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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황남대총 앵무배가 주는 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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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신문 작성일19-12-11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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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대총은 내물마립간의 무덤이라고 하는 학자와 눌지마립간의 무덤이라고 보는 학자들로 나뉜다. 그렇다 하더라도 대개 5세기 초중엽의 왕릉임에는 이견이 없는 것 같다. 아무튼 황남대총은 지금부터 45년여 전인 1973~75년 사이 조사된 적이 있다.
   이 때 출토됐던 유물은 약 3만여 점이었다. 황남대총은 남분과 북분이 있는데 남분은 남편 무덤이고 북분은 아내 무덤이라고 한다. 그러니 부부합장무덤인 셈이다.
   당시 출토된 유물 가운데 조개제품이 60여 점 있었다고 한다. 그 조개제품들은 대부분 훼손상태가 심해 도대체 무슨 기능을 한 유물이었는지 알 수 없어서 그냥 보관해 두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최근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다시 조사를 시작했는데 그 가운데 1쌍의 앵무조개잔(鸚鵡杯)을 확인했다. 황남대총 남분에서 출토된 것이니 왕이 사용했던 것이고 최상류층이 사용한 희귀한 유물인 것이다.
   이번에 확인된 앵무배와 유사한 출토품은 중국에서도 3점뿐이고 일본에서는 출토된 사례가 없을 정도로 귀하다. 1965년 발굴된 동진왕흥지부부묘에서 1점, 2015~2016년에 발굴된 영주시 신하진 전약묘촌 서진가족묘지에서 한쌍이 발굴된 것이 전부다.     앵무배는 당나라의 시선 이백의 시 양양가에 "노자표여, 앵무배여, 백년 삼만육천 일에, 하루에 삼백 배씩 기울여야지"라는 구절에 나오지만 1965년 동진왕흥지부부묘에서 발굴되기 전에는 실물을 본적이 없었다. 앵무배는 고생대 캄브리아기 전기에 출현해 그 후 멸종한 암모나이트와 유사하고 지금도 6종이 살아남은 앵무조개로 만들어졌다고 하니 그 귀함은 더할 나위가 없다. 최상위 계층에서 멸종위기의 조개로 만든 술잔을 기울이는 호사를 누렸다고 상상해 보면 우리 신라의 문화도 어지간히 화려했음이 분명하다.     그리고 이 앵무배가 중국과의 교역에서 얻어진 것이 아니라 조개 표면의 마감처리를 옻칠로 추정되는 유기물을 사용한 점으로 볼 때 중국 출토 앵무배와 다르다고 하니 순수하게 신라의 물건임이 틀림없다. 과거 신라는 변방의 조그마한 반도국가였지만 그 문화는 중국의 것과 그리 뒤지지 않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신라의 국제적인 문화수준을 가늠하는 유물이 확인된 마당에 이제 당시 신라의 위상이 어느 정도였는지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시작돼야 한다. 우리 국내 학자들의 연구 결과도 중요하지만 우리 고대사에 우호적인 세계적인 학자와의 교류도 이 시점에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 국제적인 인정을 받는 학설이 나올 때 비로소 우리 고대사가 공인될 것이고 우리의 국격은 더 높아질 것이다.
경북신문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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