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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月城 발굴, 문제점도 짚어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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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신문 작성일15-03-19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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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12월 12일 오후 2시 경주에서 신라왕궁 복원과 발굴을 알리는 고유제가 열렸다. 이것은 천년 왕조의 흔적을 땅속에서 찾아보겠다는 대역사(大役事)의 출발 신호였다.
 그리고 3개월 후 주춧돌이 드러났다. 이미 발굴에 앞서 레이저탐사를 통해 주춧돌로 추정되는 영상 군집을 확보했으므로 발굴은 비교적 수월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지난 19일 문화재청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소장 심영섭)는 사적 제16호 '경주 월성' 중앙지역 57,000㎡의 시굴조사 성과를 공개했다.
 이번 시굴조사는 지하 매장구조의 전반적인 양상을 파악하고자 표층부분을 발굴했다. 조사지역에서는 기단, 초석, 적심 등 건물지 6동과 담장 12기 등이 확인됐다. 이 중 정면 12칸, 측면 2칸의 3호 건물지는 가로 28m, 세로 7.1m의 크기로 적심 위에 초석을 올렸고 담장과 배수로가 딸려있었다. 유물은 고배, 병, 등잔, 벼루, 막새기와, 귀면기와, 치미 등 통일신라시대 전반에 걸쳐 나타났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는 "문화재청 보고 승인 후 다음 주부터 정밀발굴조사에 들어갈 예정이다"고 일 밝혔다.
 경주 월성 조사는 1914년 일제가 남벽 부근을 처음 파헤친 지 100년 만에 우리 손으로 실시한 최초의 내부조사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그리고 '경주 역사문화 창조도시 조성(왕궁 복원)'이 대통령 공약사항이 되면서 발굴에 불이 붙었다.
 월성은 신라 천년 수도의 궁성(宮城)으로 서기 101년 파사왕이 처음 쌓았다고 전해진다. 특히 삼국유사에 신라의 국보였던 전설의 피리 '만파식적(萬波息笛)'이 보관되어 있었다고 기록돼 있을 만큼 오래전부터 국가의 중요시설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신라말기에  왕실을 비롯한 많은 관리들이 개경으로 이사를 가면서 중요한 물건들도 모두 이관됐을 것으로 보여 발굴 유물은 예상보다 초라할 지도 모른다는 지적도 있다.
 발굴의 중요성에 비해 문제점도 많다. 정수성 의원은 "지난 1990년대 중반부터 문화재청이 법인으로 허가해 준 매장문화재 발굴 전문기관이 경북에만 18개가 있는데 이들을 비전문기관으로 매도하여 국가기관인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만이 발굴하는 것은 탁상행정"이라며 "장기간 문화재 발굴에 따른 시민 불편을 해소하고 문화재 발굴 정책의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위해 문화재청 지방청을 설립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신라 천년의 화려한 부활 사업은 지난(至難)한 작업임이 틀림없지만 경주 시민의 호응과 환호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도록 문화재청은 시민의 눈높이에서, 현대적인 시각으로 이를 재조명해 볼 필요가 있다.
경북신문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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