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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압지 수세식 화장실은 서역 교류의 증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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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신문 작성일17-09-26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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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동궁과 월지에서 7세기 신라시대 왕궁의 수세식 화장실 터가 발견됐다. 사람이 쪼그려 앉을 수 있고 물을 흘려 오물을 배출할 수 있도록 설계된 고급 수세식 화장실 구조를 갖췄다. 이번에 발굴된 유구는 화장실 건물 안에 변기가 있고 변기를 통해 나온 오물이 잘 배출될 수 있도록 점차 기울어지게 설계된 암거(暗渠) 시설까지 갖춘 복합 변기형 석조물이 있는 구조다.
 문화재청은 "변기형 석조 구조물은 양다리를 딛고 쪼그려 앉을 수 앉는 판석형 석조물과 그 밑으로 오물이 밖으로 나갈 수 있게 타원형 구멍이 뚫린 또 다른 석조물이 조합된 형태"라며 "구조상 변기형 석조물을 통해 내려간 오물이 하부의 암거(暗渠·지하에 고랑을 파서 물을 빼는 시설)로 배출됐던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또 "사용 방식은 변기에 물을 흘려 오물을 제거하는 수세식으로 추정되며 물을 유입하는 설비가 따로 갖춰지지 않은 것으로 봐서 준비된 항아리 등에서 물을 떠서 변기하부로 오물을 씻어 내보내는 방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7세기 신라시대에 이처럼 앞선 화장실 시설이 있었다는 점은 신라문화가 얼마나 뛰어났던 것인지를 말해준다. 특히 현재까지 국내에서는 변기시설만 발견(불국사·8세기)되거나 화장실 유구(익산 왕궁리·7세기 중엽)만 확인되었을 뿐인데 화장실 건물과 변기시설 그리고 오물 배수시설이 같이 발굴된 사례는 없었다. 동궁과 월지에서 확인된 화장실 유구는 화장실이라는 공간과 그 부속품들이 한자리에서 발견된 최초의 사례로 현재까지 조사된 통일신라시대까지의 고대 화장실 중 가장 고급형이라고 한다.
 미루어 짐작컨대 신라시대의 왕궁에서 수세식 화장실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외래문화가 유입된 소산이라고 볼 수 있다. 신라가 당대에 그만큼 서역과의 교류가 다방면에 걸쳐 빈번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단순하게 시설만 받아들였다고는 볼 수 없고 서역의 앞선 문명을 지닌 사람이 신라로 와서 그 문화를 전해줬을 가능성이 크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그 저력으로 1천년 사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런 문화적 저력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신라 천년의 문화적 자부심을 이제 본격적으로 계승해야 할 때다. 당시의 빼어난 문화를 간직하고 유지하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신라문화의 새로운 재현, 복원, 재생을 통해 미래에도 역사로 남을만한 새로운 문명을 만들어야 한다. 과거의 영광에 얽매이고 쓰다듬고만 있어서는 안 된다. 속속 드러나는 신라문화의 우수성을 다시 한 번 재현, 발현할 때다.
경북신문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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