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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 글쟁이 능소(凌宵) 이어령 선생을 기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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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경북신문 작성일22-02-27 18:57 조회7,656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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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론가 이어령 선생의 마지막 내놓은 코로나사태에 통찰력 있는 전망이 화제다. "독재자를 피해선 도망갈 수 있지만 지금은 도망가면 백신도 맞을 수 없다"며 "각국 지도자들이 백신을 배급해 생명을 살려주는 신과 같은 존재로 군림할 수 있다"고도 했다.
   1934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나 서울대 국문학과와 대학원 철학과에서 공부한 그는 '천재과'에 속한다고 주위에선 평가한다. 대학 2학년 재학 중에 한국일보에 기성문단을 신랄하게 폭격하는 '우상의 파괴'를 써 그야말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이어 1959년 경향신문에서 당시 문단의 주류이며 꽤 이름이 있던 김동리와 지상 '비문(非文)논쟁'을 벌여 더욱 이름을 떨치게 됐다. 이어 1963년에 불멸의 명저 '흙속에 저 바람 속에- 이것이 한국이다'를 출간, 당시로서는 깜짝 놀랄 만한 수치인 10만부가 팔리며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단했다.
   서울신문 논설위원에 발탁된 이후 잠시 언론의 길을 걷기도 했다. 1967년 33세의 나이로 이화여대 국문과 교수로 임용돼 30년 넘게 강단에 섰다. 1973년에는 잡지 '문학사상'과 출판사 '문학사상사'를 설립했고, 1977년 국내 최고 권위의 문학상 중 하나로 꼽히는 '이상 문학상'을 제정했다. 1988올림픽 개막식 기획자로서 개막식에 '굴렁쇠 소년'과 '벽을 넘어서' 구호는 모두 이어령 선생의 아이디어였다. '화합과 전진'이라는 주제의식과 역동성을 모두 표현해낸 명문으로 평가받는 '세계적 창의성'은 국보(國寶)급이다.
   이어령 선생의 삶에서 최전성기라 할만한 '사건'은 일본에서 일본어로 먼저 간행된 '축소지향의 일본인'이 그야말로 대성공을 거두면서 국내에서도 초대박을 쳤다. 그는 사통오달, 팔방미인, 너무 다재다능해서 뭐라고 직업을 쓰기가 어려운 분이다. 당신 스스로는 '작가'라는 단어에 자부심이 강했고, 평생 100권 이상의 책을 쓰셨지만 글에 대한 욕심과 긍지는 오만하다고 할 만큼 대단했다. 선생의 일대기에 세상을 놀라게 한 크고 작은 일들이 너무 많았다. 고교시절 이 선생의 '흙속에 저 바람 속에'를 접했는데, 충격이 컸다. 파리에 사는 딸 부부에게 가끔 책을 보내기도 했는데, 이어령 선생 책이 프랑스에서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1990년 노태우 정부에서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당시 한국예술종합학교와 국립국어연구원(현 국립국어원)을 설립했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철거하는 경복궁 복원계획을 수립했다. 미술 대중화에 기여한 국립현대미술관의 '움직이는 미술관' 행사를 기획하기도 했다. 또 문화예술상(1979), 체육훈장맹호장(1989), 일본문화디자인대상(1992), 대한민국녹조훈장(1992), 대한민국 예술원상(2003), 3·1문화상 예술상(2007), 자랑스러운 이화인상(2011), 소충사선문화상 특별상(2011) 등을 받았다.
   고(故) 이어령 선생은 코로나 사태에 통찰력 있는 전망을 내놓아 화제가 됐다. "포스트 코로나를 이끄는 건 주류가 아니라 보리밭처럼 밟히고 올라온 마이너리티가 될 것"이라며 "사람들의 편견을 바로잡는 역할을 지식인이 해야 한다"고 글쟁이 마지막 남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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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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