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맑은 청정지역이라 유명… 형제봉 아래 고요한 `송전1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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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식 작성일20-10-13 18:21본문
↑↑ 송전1리 전경.
[경북신문=김영식기자] 송전1리는 예부터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소나무숲이 곳곳에 빼곡하게 남아 있다. 형제봉 아래 고요한 송전1리는 말 그대로 청정지역이다. 암반수를 받아 식수로 사용할 만큼 물이 맑기로 소문난 마을이기도 하다.
↑↑ 추수를 끝낸 송전1리 기부골의 모습.
송전1리는 사창(射倉), 하기곡(下機谷), 상기곡(上機谷)마을 등 3개 자연마을로 구성돼 있다. 사창마을은 약 400년 전 두산리 장아곡에 자리를 잡았던 김석견의 후손과 최창해의 후손들이 일부 두산리 양지마을 옆 이 마을에 이주해 살았다. 옛날에는 사장(射場)이라고 해서 화살을 쏘는 표적이 있었고 활과 화살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고 해서 사창이라고 불렀다.
↑↑ 송전1리의 최고령자 이종숙 할머니.
기곡은 마을 앞산의 형세가 베틀모양이고 산 앞으로 흐르는 내가 베를 짤 때 물을 뿌리는 것처럼 흐른다고 해서 기부골(機富谷)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송전1리는 김해김씨 두산문중의 집성촌이다. 현재 48가구 81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이 마을에는 지금도 약 35가구 정도가 김해김씨다. 48가구 중 10 가구는 울산에서 이주해 온 귀농인들이 살고 있다. 현재는 비교적 작은 마을로 분류되지만 약 30년 전만 하더라도 송전1리에는 지금보다 두 배나 많은 주민이 살았다고 한다.
↑↑ 제1발전소 화학기술부 직원들이 마을 환경정화활동을 펼치고 있다.
송전1리의 주민들은 주로 밭농사를 하면서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았다. 특용작물도 없이 가족들이 먹고살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규모의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마을의 여성들은 형제봉에서 산나물을 채취해 어일장이나 입실장에 내다 팔아 반찬값을 보탰다. 취나물, 참나물, 다래순, 엉겅퀴 등의 산나물은 다른 지역보다 맛이 좋아 인근 도시의 시장에 내다팔기에 인기가 좋았다.
↑↑ 송전1리 입구의 작은 구멍가게. 오래전 폐업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간판이 퇴색한 채 걸려 있어 정겨운 모습이다.
주민 한두이(여·80)씨는 "젊은 시절 친정어머니가 집에 오셨을 때 형제봉에서 얻은 산나물을 방에 쏟아부으니 '무슨 나물에서 한약냄새가 나느냐'라고 물을 정도로 이 마을의 산나물은 몸에도 좋다는 소문이 났다"며 "산나물을 인근 시장에 내다팔아 가족들이 필요한 생필품을 사서 돌아오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이 마을의 산나물은 지금도 부산이나 울산의 상인들이 차를 몰고와 거둬간다고 한다.
↑↑ 송전1리 박영숙(오른쪽) 이장이 주민들과 마을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마을길은 새마을사업으로 길이 넓혀지기 전까지 리어카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좁았다. 정순필(여·82)씨는 "농사를 지을 때 리어카도 다닐 수 없이 길이 좁아 남자들은 지게를 졌고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 힘들게 살았다"며 "나물 캐서 어일장을 갈 때는 도가실 산을 넘어 등에는 아이를 업고 머리에는 나물을 이고 20길을 걸었지만 새마을사업으로 농로가 뚫리고 두산교가 만들어져 지금은 장에 가기에 엄청나게 좋아졌다"고 말했다.
청정지역 송전1리의 환경은 지금도 어느 지역보다 좋다. 박영숙 이장은 "지금도 밤이면 방충창에 반딧불이가 수도없이 몰려와 반짝거린다"고 말했다. 박 이장은 울산에서 살다가 9년 전 귀농했다. 박 이장은 "남편이 울산의 기업에서 퇴직하고 난 후 귀촌을 위해 주변 도시 10군데를 돌아다니다가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됐다"며 "아무 연고도 없이 정착했지만 주민들이 워낙 다정하고 친척처럼 대해주셔서 지금은 정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 송전1리의 평화로운 마을모습.
송전1리의 최고령자는 이종숙(95) 할머니다. 이 할머니는 영지에서 17살에 시집와 지금까지 송전리에서 살고 있다. 이 할머니는 "시집와서 보니 지독하게 가난한 집안이어서 고생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했다"며 "김해김씨 큰집에서 머슴을 사는 남편의 세경으로 그나마 6남매를 다 키웠으니 기적과도 같다"고 술회했다. 이 할머니는 "땅도 집도 없고 가족은 많아 고생스럽게 살았던 젊은 시절이 다 지나갔지만 지금은 이 마을이 마치 내 몸과 같이 편안하다"고 말했다.
월성원전의 자매마을은 제1발전소 화학기술부다. 변혜정 대리는 "송전1리는 여성 이장님이 마을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꾸며 정감이 가는 마을"이라며 "옛날에는 가난하게 살았지만 지금은 어느 마을보다 넉넉한 인심을 가진 주민들에게 더욱 가까이 가서 도울 수 있는 것을 찾겠다"고 말했다.
김영식 7494929@naver.com
[경북신문=김영식기자] 송전1리는 예부터 소나무 숲이 울창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소나무숲이 곳곳에 빼곡하게 남아 있다. 형제봉 아래 고요한 송전1리는 말 그대로 청정지역이다. 암반수를 받아 식수로 사용할 만큼 물이 맑기로 소문난 마을이기도 하다.
↑↑ 추수를 끝낸 송전1리 기부골의 모습.
송전1리는 사창(射倉), 하기곡(下機谷), 상기곡(上機谷)마을 등 3개 자연마을로 구성돼 있다. 사창마을은 약 400년 전 두산리 장아곡에 자리를 잡았던 김석견의 후손과 최창해의 후손들이 일부 두산리 양지마을 옆 이 마을에 이주해 살았다. 옛날에는 사장(射場)이라고 해서 화살을 쏘는 표적이 있었고 활과 화살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었다고 해서 사창이라고 불렀다.
↑↑ 송전1리의 최고령자 이종숙 할머니.
기곡은 마을 앞산의 형세가 베틀모양이고 산 앞으로 흐르는 내가 베를 짤 때 물을 뿌리는 것처럼 흐른다고 해서 기부골(機富谷)이라고 부르게 됐다고 한다.
송전1리는 김해김씨 두산문중의 집성촌이다. 현재 48가구 81명의 주민이 살고 있는 이 마을에는 지금도 약 35가구 정도가 김해김씨다. 48가구 중 10 가구는 울산에서 이주해 온 귀농인들이 살고 있다. 현재는 비교적 작은 마을로 분류되지만 약 30년 전만 하더라도 송전1리에는 지금보다 두 배나 많은 주민이 살았다고 한다.
↑↑ 제1발전소 화학기술부 직원들이 마을 환경정화활동을 펼치고 있다.
송전1리의 주민들은 주로 밭농사를 하면서 자급자족하는 삶을 살았다. 특용작물도 없이 가족들이 먹고살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낼 규모의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마을의 여성들은 형제봉에서 산나물을 채취해 어일장이나 입실장에 내다 팔아 반찬값을 보탰다. 취나물, 참나물, 다래순, 엉겅퀴 등의 산나물은 다른 지역보다 맛이 좋아 인근 도시의 시장에 내다팔기에 인기가 좋았다.
↑↑ 송전1리 입구의 작은 구멍가게. 오래전 폐업을 한 것으로 보이지만 간판이 퇴색한 채 걸려 있어 정겨운 모습이다.
주민 한두이(여·80)씨는 "젊은 시절 친정어머니가 집에 오셨을 때 형제봉에서 얻은 산나물을 방에 쏟아부으니 '무슨 나물에서 한약냄새가 나느냐'라고 물을 정도로 이 마을의 산나물은 몸에도 좋다는 소문이 났다"며 "산나물을 인근 시장에 내다팔아 가족들이 필요한 생필품을 사서 돌아오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말했다. 이 마을의 산나물은 지금도 부산이나 울산의 상인들이 차를 몰고와 거둬간다고 한다.
↑↑ 송전1리 박영숙(오른쪽) 이장이 주민들과 마을 현안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있다.
마을길은 새마을사업으로 길이 넓혀지기 전까지 리어카도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좁았다. 정순필(여·82)씨는 "농사를 지을 때 리어카도 다닐 수 없이 길이 좁아 남자들은 지게를 졌고 여자들은 머리에 이고 힘들게 살았다"며 "나물 캐서 어일장을 갈 때는 도가실 산을 넘어 등에는 아이를 업고 머리에는 나물을 이고 20길을 걸었지만 새마을사업으로 농로가 뚫리고 두산교가 만들어져 지금은 장에 가기에 엄청나게 좋아졌다"고 말했다.
청정지역 송전1리의 환경은 지금도 어느 지역보다 좋다. 박영숙 이장은 "지금도 밤이면 방충창에 반딧불이가 수도없이 몰려와 반짝거린다"고 말했다. 박 이장은 울산에서 살다가 9년 전 귀농했다. 박 이장은 "남편이 울산의 기업에서 퇴직하고 난 후 귀촌을 위해 주변 도시 10군데를 돌아다니다가 이 마을에 정착하게 됐다"며 "아무 연고도 없이 정착했지만 주민들이 워낙 다정하고 친척처럼 대해주셔서 지금은 정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다"고 했다.
↑↑ 송전1리의 평화로운 마을모습.
송전1리의 최고령자는 이종숙(95) 할머니다. 이 할머니는 영지에서 17살에 시집와 지금까지 송전리에서 살고 있다. 이 할머니는 "시집와서 보니 지독하게 가난한 집안이어서 고생을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했다"며 "김해김씨 큰집에서 머슴을 사는 남편의 세경으로 그나마 6남매를 다 키웠으니 기적과도 같다"고 술회했다. 이 할머니는 "땅도 집도 없고 가족은 많아 고생스럽게 살았던 젊은 시절이 다 지나갔지만 지금은 이 마을이 마치 내 몸과 같이 편안하다"고 말했다.
월성원전의 자매마을은 제1발전소 화학기술부다. 변혜정 대리는 "송전1리는 여성 이장님이 마을을 깨끗하고 아름답게 꾸며 정감이 가는 마을"이라며 "옛날에는 가난하게 살았지만 지금은 어느 마을보다 넉넉한 인심을 가진 주민들에게 더욱 가까이 가서 도울 수 있는 것을 찾겠다"고 말했다.
김영식 749492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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