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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식 생활칼럼] 바닥에서 하늘을 꿈꾸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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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김혜식 작성일21-04-01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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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필가 김혜식젊은 날엔 마음의 규각 圭角이 별반 없었다. 나이 들면서 이런 마음의 각角이 다소 날을 세우게 된 연유엔 험난한 세파로부터 찌들은 탓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난날 어린이를 대상으로 교육 사업을 할 때 일이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남루한 옷차림을 한 할머니 한 분이 초등학생을 데리고 내가 운영하는 학원을 내원했다. 마침 아이들에게 논술을 지도하던 나는, 일을 잠시 멈추고 원장실서 그 할머니를 맞이했다.
   이때 쭈뼛쭈뼛 하는 태도로 학원 문을 들어선 아이는 어인일인지 입구서부터 우두커니 서서 더 이상 걸음을 뗄 생각을 안했다. 이를 본 나는 하는 수없이 냉장고 속에서 시원한 음료수 한 병을 꺼내 할머니와 그 아이에게 건넸다.
   그제야 아인 음료수를 한 모금 마시더니 선뜻 걸음을 옮긴다. 그 아이 손을 잡을 때다. 아이답지 않게 거친 손의 촉감과 손톱 밑에 낀 새카만 때를 발견하곤 두 사람의 고달픈 삶을 직감했다. 내 손에 이끌려 가까스로 원장실로 들어온 아이는 자신의 할머니 곁에 조신하게 앉는다.
   당시 학원생들을 상담하는 선생님이 별도로 있었으나 왠지 그날만큼은 직접 상담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몹시 삶에 지친 듯 매가리가 없어 보이는 할머니는 말없이 몇 초간 앉아 있더니 간신히 더듬더듬 말문을 열어, "선생님, 저의 손녀를 부탁드립니다. 초등학교 3학년인데 아직 한글도 제대로 못 뗀 상탭니다. 아이 어미가 세 살 때 가출하고 혼자 키우다보니 제가 가르칠 수 없어서 이곳엘 데리고 왔습니다" 라고 한다.
   한글을 아직 못 떼었다는 말에 다소 부담감은 있었으나, 비록 사설 학원일지언정, 어린이에게 진정한 학문과 지식을 가르친다는 사명감이 누구보다 컸기에 할머니의 그 말에 자신 있게 화답을 했다. 무엇보다 아이가 어머니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처지에 연민의 정이 솟구쳤던 것이다.
   " 걱정 마십시오. 한글쯤이야 장담컨대 몇 달 안으로 터득 시키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아이를 원생으로 받아드릴 것을 허락했다. 이 때 할머니랑 대화를 나누던 중, 갑자기 원장실 문이 열리더니 원생 한 명이 공책을 들고 나를 찾는다.
    수업을 하다말고 나온 터라 할머니께 잠깐 기다리라고 말 한 후, 원내 외진 곳에 위치한 논술 교실로 들어섰다.
   이십 여 분 간 하던 수업을 마치고 다시금 원장실을 찾았을 땐 아이와 할머니 모습이 간곳이 없었다. 학원 원내에 요즘 그 흔한 cctv조차 설치할 생각을 못했던 24년 전 이야기다.
   급히 원장실을 뛰쳐나가 화장실 문을 열어보았다. 거기에도 조손祖孫의 모습은 흔적조차 없었다. 이층 창가에 가서 바깥을 내다봤으나 어디에도 그들의 종적은 찾을 수 없었다. 순간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고 보니 원장실 책상 위에 무심코 놓은 핸드백이 떠올랐다.
   황급히 원장실에 들어온 나는 아연실색 하였다. 불과 한 시간 여 전에 학원에 출근하면서 그곳에 두었던 핸드백이 자취 없이 사라진 게 아닌가. 물론 핸드백 속엔 신분증, 카드, 얼마간의 현금을 비롯 화장품 및 당시에 출시됐던 목침만한 핸드폰까지 들어 있었다.
   한동안 무엇으로부터 뒤통수를 한 대 세게 얻어맞은 듯한 통증을 느꼈다. 그 아픔은 곧이어 종전에 모습을 감췄던 아이와 할머니의 모습을 나로 하여금 다시금 연상하게 하였다.
   아이의 순진무구한 까만 눈동자와 물건을 도둑질 할 것이라는 생각은 전혀 할 수조차 없었던 마냥 순박하고 자애로워만 보이던 할머니 모습이 아닌가. 불과 몇 십분 전 보아왔던 두 사람의 모습이 동시에 눈앞에 어른거렸다.
   그날 온종일 좀체 그 둘의 모습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다. 나이가 지긋한 그 할머니를 생각할 때마다 외양만 보고 사람을 믿었다는 나의 순수함이 못내 뉘우쳐졌다.
   무엇보다 별다른 경계심 없이 낯선 사람을 신뢰했다는 마음에 자신을 탓하기도 했다. 어디 이뿐인가. 세상물정 모르는 천진난만한 어린이를 앞세워 타인의 측은지심을 촉발 시킨 후 기회를 포착하여 남의 물건을 훔친 할머니의 치밀한 범죄 수법에서 더욱 그의 죄질이 파렴치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할머니에게 핸드백을 절도 당한 후 한동안 나는 가슴에서 그 일이 떠나질 않았다. 한편으론, '그 아인 진짜 할머니 손녀딸이 맞을까? 아님 앵벌이일까?' 라는 온갖 추측이 나를 휩싸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그날 어린아이의 왠지 불안에 떠는 듯 했던 첫인상과 꾀죄죄한 행색이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옛말에 '사흘 굶어서 도둑 안 될 사람 없다'고 했다. 아무리 형편이 궁핍하여 생계를 위협받기로서니 어린이를 자신의 범죄 도구로 삼다니, 도저히 그 할머니 죄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날 할머니의 초라한 입성과 아이의 허름한 차림새에서 나는 한 눈에 어려운 삶을 사는 사람들이라는 생각에 아이 학원 비까지 자청하여 절반으로 받을 것을 약속까지 했잖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고마움을 절도라는 죄로 당장 갚다니, 그날의 일을 요즘도 곱씹을수록 그 할머니가 참으로 괘씸하다. 물건을 도둑질한 것도 부족하여 내가 베푼 배려와 한편 따뜻한 마음까지 짓밟았잖은가.
   세상을 살면서 가장 실망이 크고 분노할 때는 자신의 진심이 누군가로부터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가 아닐까 싶다.
   아무리 세태가 각박하고 삶이 고달플지라도 자신을 인간적으로 믿고 신뢰하는 사람을 실망이라는 구렁텅이로 빠뜨렸던 지난날 그 할머니, 아마도 지금쯤은 고인이 되었을 법한 당시 연령이었다. 과연 그는 눈을 감으면서 어떤 생각을 하였을까. 생전의 자신의 죗값을 뉘우치는 최소의 양심은 지니고 저승길을 찾았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수필가 김혜식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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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