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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석(昔)씨 왕들의 이야기] 23. 석씨 왕가의 마지막 흘해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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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작성일20-05-31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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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경북신문=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성은 석(昔), 이름[諱]는 흘해(訖解), 왕호(王號)는 이사금(尼師今)이다.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걸해이질금(乞解尼叱今)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의 제10대 석내해왕(昔奈解尼師今, 재위 196~230)의 아들인 석우로(昔于老)와 제11대 석조분왕(助賁尼師今, 재위 230∼247)의 딸인 명원부인(命元夫人) 석씨(昔氏)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현대적 용어로는 '근친혼'의 관계라 하겠다.

  신라 초기의 왕위 계승은 박씨와 석씨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박씨는 석씨와 혼인관계를 맺으면서 동일 가계 내에서 아들과 사위가 있으면 연장자 계승, 아들이나 사위의 나이가 어리면 형제 계승의 형식으로 왕위계승이 이루어지는 원리를 유지했다. 그리고 이러한 왕위 계승권은 두 성씨의 혼인관계 속에서 세대를 내려가며 계승되었지만. 당시로서는 신분상의 혈통 계승을 위하여 같은 성끼리도 친 형제가 아니면 왕족간의 혼인이 이루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곧 석흘해왕(昔訖解尼師今)은 석내해왕의 손자이자 석조분왕의 외손자인 셈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석흘해왕이 어려서 몸이 약해 걸음을 걷지 못해 언제나 다른 사람이 안은 채 말에 태워 다녔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용모가 준수하고 범상치 않았을 뿐 아니라 명민하고 일처리가 남달라서, 아버지인 각간(角干) 석우로는 아들 흘해가 집안을 흥하게 할 것이라고 자랑했다고 한다.

                        석흘해가 왕좌에 오르기까지의 배경을 다시 정리해 보면 : 흘해왕의 아버지인 석우로는 임금을 섬김에 공로가 있어 여러 번 승진하여 서불한(舒弗邯 : 신라 때, 십칠 관등 가운데 첫째 등급의 벼슬)이 되었는데, 흘해의 용모가 뛰어나고 마음이 강직하고 총명하며 일을 처리하는 것이 보통 사람과 다른 것을 여러면에서 체험하고 확인한 아버지로서 제후(諸侯 : 지역 단위로 백성을 다스리던 관료)에게 말하였다.
 
  "우리 집안을 일으킬 사람은 틀림없이 이 아이일 것이다" 이때에 석기림왕(昔基臨王)이 죽고 아들이 없었으므로 여러 신하들이 의논하여 말하였다. "흘해는 어리지만 나이 많은 어른처럼 덕망이 있다" 그리고는 석흘해를 받들어 임금으로 세우자고 뜻을 모았다. '삼국사기'에는 당시 신하들이 석흘해왕이 나이는 어려도 늙어서야 이룰 수 있는 덕을 지니고 있다고 의논하여 그를 왕으로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왕위에 오른 석흘해왕은 새해(서기 311)가 되어 추위가 풀린 2월이 되자 맨 먼저 몸소 시조묘에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급리(急利)를 아찬으로 삼아 국정을 맡기고 내외병마사(內外兵馬事)를 겸하게 했으며, 314년(흘해 5)에는 그를 다시 이찬으로 삼았다. '삼국유사'에는 석흘해왕 때 백제가 처음 신라를 침공해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제8대 박아달라왕(朴阿達羅尼師今, 재위 154∼184) 때인 167년(박아달라 14)과 170년(박아달라 17)에 이미 백제가 신라의 변경(국경 변두리)지역을 잇달아 침공해왔다는 '삼국사기'의 기록과는 차이가 있다.

  오히려 '삼국사기'에는 석흘해왕 때 신라가 백제로 사신을 보내(337년) 예방하거나 국경지대에서 양국의 수장이 직접 만나서 협상하는 등으로, 군사·문물교류에 관한 문제들을 해결하므로서 비교적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 3월에는 우박이 떨어졌고, 여름인 4월에는 서리가 내렸다.
 
                      한편 왜(倭)와의 갈등 관계는 심각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석흘해왕은 왜국과의 관계가 그리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 연유를 살펴보니 일찍이 그의 아버지인 각간 석우로가 왜인에게 살해되었고, 김미추왕(味鄒尼師今, 재위 262~284) 때에는 어머니인 명원부인 석씨가 남편의 복수를 위해 왜국 사신을 죽이게 되자 이 사건에 분노한 왜인들이 금성으로 쳐들어오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기 때문이다.

  312년(흘해 3) 춘3월 왜국의 왕이 사신을 보내 자기 아들을 위해 구혼을 해오자, 석흘해왕은 아찬 급리의 딸을 보냈다. '原文 : 三年 春三月 倭國王遣使 爲子求婚 以阿飡急利女送之' 하지만 왜국은 344년(흘해 35) 다시 사신을 보내 석흘해왕의 딸과의 청혼을 해왔고, 왕은 딸이 이미 출가했다며 이를 거절했다. 결국 왜왕은 이듬해 국교의 단절을 알리는 서신을 보내왔다.  <계속>
석씨대종회 원로회장 석진환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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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