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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희 특별기고]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목숨을 내놓는 것이 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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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수 윤경희 작성일20-06-22 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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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송군수 윤경희호국보훈의 달, 6월도 어느덧 중순을 훌쩍 넘기고 있다. 함께 이겨낸 역사를 국민 모두 기리기 위해 지정한 달인만큼 투쟁과 희생으로 나라를 지킨 선조들의 자취를 자꾸만 곱씹어보게 되는 날들이다.
 
  그런 6월의 첫 날은 법정기념일인 '의병의 날'이다. 이 날이 필자에게 더 뜻 깊었던 이유는 바로 청송군 읍 소재지에서 부남면으로 넘어가는 길목 높은 언덕에 '항일의병기념공원'이 자리하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전국의 모든 의병선열들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전국에서도 '청송'하면 충의의 고장이자 의병의 성지로 꼽힌다. 뼈아픈 역사의 자취를 되돌아볼 수 있도록 조성된 항일의병기념공원이 우리 청송군에 자리한 연유 또한 바로 그것이다.
 
  기실 청송의 항일투쟁 역사는 의병으로 대변되며, 대한민국 독립유공 인물록에 의병유공자로 등재된 선열 2천657명 중 청송군 출신이 95명으로 전국에서 가장 많다. 
 
  이런 기록은 청송의진의 활동을 기록한 '적원일기'에 잘 나타나 있다. '의진'이라 함은 의병의 군진, 즉 의병이 적과의 효율적인 전투를 수행하기 휘한 전투 대형쯤으로 알고 있으면 좋겠다. 좀 더 면밀히 말하자면 1896년 3월부터 5월까지 일기식으로 기록된 '적원일기'는, 나라가 외적의 침입으로 위급할 때 국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외적에 대항했던 자취를 남긴 문서이다.
 
  청송의병은 제천의병과 함께 공식 기록을 남긴 대표적 의병이기도 하다. 따로 서기를 뽑아서 활동을 기록하게 할 정도로 청송의진의 규모는 크고 또 체계적이었다고 볼 수 있다.
 
  청송군의 독립운동은 청송의진이 결성된 1896년부터 1945년까지 시기에 따라 강약을 거듭하면서 이어졌으며, 그 가운데 실로 가장 강한 면모를 보인 것이 의병이었다.
 
  1896년 1월 청송의진 대장 심성지를 중심으로 시작된 항일 투쟁은 같은 해 허훈 대장의 진보의진을 거쳐 1906년 정용기, 최세윤 대장이 이끄는 산남의진과, 이현규가 결성하여 청송·진보·영양·영해 등 여러 곳으로 출진하여 가는 곳마다 주둔한 일본군과 교전하여 큰 성과를 거둔 진성의진으로 이어진다.
 
  사실 청송 항일투쟁의 역사는 훨씬 더 이전의 선조로부터 비롯된 것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부터 많은 청송인들이 의병의 군진에 자발적으로 참여했다.
 
  청송이 직접 공격당하지는 않았지만 국토를 유린하고 백성들을 짓밟은 왜구에 맞서 국가를 지키고자 하는 마음이 불타올랐던 것이다.
 
  당시 우리 지역의 선조들은 '평상시에 나라가 부르면 조정에 나아가 임금을 도와 나라를 다스리고, 그렇지 않으면 고을을 다스리고,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는 목숨을 내놓는 것이 도리'라 생각한, 진정한 군자이자 애국자였던 것이다.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지켜온 나라인데 국력이 쇠해진 구한말 일제의 국권침탈 야욕의 만행은 다시 한 번 아픈 역사를 되풀이하게 했다. 그 역사를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이에 우리 항일의병선열들은 민족의 자존과 국권수호를 위하여 온몸을 불사르며 일본의 제국주의에 맞선 것이다.
 
  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거센 투쟁으로 의로움을 이어왔던 우리 고장 청송. 그 선조들의 발자취가 고스란히 스민 우리 청송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이라서, 6월이 더 없이 푸르고 또 감사하다.
청송군수 윤경희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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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