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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영관 특별기고] 어느 죽음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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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전문가 고영관 작성일20-07-14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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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T전문가 고영관절망과 분노 모두가 사람을 헤친다. 그러나 절망보다 분노가 더 났다는 말이 있다. 왜냐하면, 절망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지만, 분노는 오히려 사람을 더욱 강하게 만들 때도 있기 때문이다.
 
  타인을 죽이는 행위나 자신을 죽이는 행위 모두를 살인으로 규정하여 죄악시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종교적 관점일 뿐이라 생각되고, 피할 수 없는 궁지에 몰린 사람이 취할 수 있는 최후의 현실도피는 죽음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뉘라서 함부로 사자(死者)의 용단과 선택을 재단하려 드는가? 하늘 부끄러운 일을 저지르고도 수치를 모르고, 죽을 용기조차 없는 나약한 인간들, 아니 뻔뻔한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가?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이 스스로의 의지로 삶을 얻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독 인간만은 자신의 의지에 의해 스스로의 삶을 종식시킬 수 있는 수단을 가졌다.
 
  삶이 축복인가 아니면 재앙인가라는 문제는 철학적 논제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한 것은 어느 누구도 삶을 얻는 순간부터 관습적, 제도적, 법률적, 윤리적 속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사실이다.
 
  때문일까? 어떤 종교에서는 완전한 무애(無 )의 세계를 동경하여, 일생동안 하나의 목표를 향해 정진해 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오욕(五慾)의 굴레를 벗어 던지지 못한 채, 임종에 이르러 열반(涅槃)을 삼는다.
 
  의식이 멸해야 오욕이 사라지고, 오욕이 사라질 때 비로소 달성되는 해탈(解脫)! 따라서 살아있는 모든 사람은 탈은 쓰고 있는 셈인데, 누가 누구를 향해 위선자라 하는가?
 
  우리가 보기에 극단적일지라도 그 에게는 최선의 선택이었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인간에게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와 권리는 신(神)이 인간에게 부여한 마지막 은총일 수도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인데, 아마도 동의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기는 하다.
 
  우리는 아무도 죽은 자에게 그 죽음에 대한 소명을 들은 바 없기에, 그 선택의 이유를 확정하기가 어렵다. 사자(死者)에게 마지막 삶의 탈출구마저 봉쇄해버린 누군가의 비정함을 탓하기 전에 우리 모두가 공범이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살아서는 달성할 수 없는 목표임을 알면서도 피안(彼岸)을 동경하는 구도자들처럼, 사람들은 늘 존재하지 않는 신(神)을 원하고 만들려 해온 것이 아닐까? 그러니까 우리가 그 신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이후에도 신이 되지 못한 사람들의 투신행렬을 멈추기는 어려울 터이다.
 
  욕망은 다스려 질 수 있는 대상이 아니기에, 다만 직관(直觀)할 뿐이다. 어떤 철학자가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다는데, 내가 보기에 그것은 말꾼들의 말장난일 뿐,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하기 때문에 생각할 수밖에 없고, 생각이 바로 형상 없는 대상에 집착을 만드는 게 아닌가 한다.
 
  즉, 대상이 존재하는 한 집착을 멈출 수가 없으니, 대상이 존재하지 않음을 먼저 알아채면 집착이 소멸될 것이라는 얘기다.
 
  나는 요즘, 그 눈에 보이지도 않는 미생물체 때문만이 아니라, 원래가 콘텍트 보다는 언텍트를 선호하는 편이라, 이래저래 노숙과 진배없는 생활을 하며, 한동안 뉴스조차도 보지를 않았었는데, 마눌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나와는 조금은 개인적인 인연도 있었던 한 사람이 저 세상으로 갔다는 소식이었는데, 놀라움과 함께 딱히 대상도 없이 갑자기 내 마음속에 밀려드는 알 수 없는 이 추상적 분노의 실체는 과연 무엇인지 생각중이다.
IT전문가 고영관   kua34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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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출처 : 경북신문 (www.kbsm.net)